두 거장의 대시(對詩)_[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대시(對詩)에 대하여
다니카와 슌타로의 들어가는 말을 보면 둘이서 짓는 시를 일본에서는 '대시(對詩)'라고 부른답니다. 신경림 시인과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이 함께한 대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번역자인 요시카와 나기 씨를 중간에 두고 전자메일로 진행되었습니다. 닮지 않은 듯하며 닮은 두 거장이 주거니 받거니하며 써내려간 시는 삶을 진솔하게 담아낸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들어가는 말' -전략-
시는 자칫하면 모놀로그 비슷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만, 대시는 좋든 싫든 간에 다이얼로그(dialogue)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떠오르지 않는 말이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뜻밖에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대시나 연시의 활력은 바로 그런 점에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할 때도 시인들은ㅡ그들도 그 안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ㅡ또 하나의 편안한 공간에서 정치인들의 언어와 차원이 다른 시의 언어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게 좋습니다.
2014년 섣달
다니카와 슌타로
책의 구성(160쪽)
ㆍ들어가는 말: 디니카와 슌타로
ㆍ 대시(對詩): 두 시인이 1월부터 6월까지 시로 대화를 나누다.
ㆍ 시(詩): 두 시인이 서로의 대표작 중에서 좋아하는 시를 뽑아 쓰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
<20억 광년의 고독 / 슬픔 / 책 / 자기소개 / 임사선(臨死船)>
신경림의 시
<겨울밤 / 갈대 / 숨 막히는 열차 속 /떠도는 자의 노래 / 낙타>
ㆍ 대담
도쿄 편: 2012년 6월 30일, 재일본 한국 YMCA(도쿄)
파주 편: 2013년 9월 29일, 파주출판도시 지지향호텔 1층
ㆍ 에세이essay: 두 시인의 유년을 떠올리는 에세이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문학의 문학, 2009)에서 발췌
다니카와 슌타로- 자서전적 단편 [20억년의 고독]에서 발췌
ㆍ 내가 좋아하는 물건
ㆍ 나오는 말 : 신경림
ㆍ 옮긴이의 말 : 요시카와 나기
ㆍ 약력
대시의 맛
다나카와의 시로 시작된 대시는 신경림의 시로 끝이 난다. 총 24편의 시로 상대의 이야기와 시정으로 또 다른 시정을 풀어내는 맛이 있다. 다나카와의 말대로 서로의 관계 속에서 뜻하지 않은 시가 탄생하는 신비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1. 다니카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조선백자 항아리 역사가 흠집을 남겼는데도 항아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가을. 항아리는 아답한 들꽃을 말없이 그러안고 있다. |
2. 신경림 간밥에 문득 이슬비 스쳐가더니 소나무에도 새파랗게 물이 오르고 동백도 벙긋이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 새롭게 항아리에 새겨 바다 건너 벗들에게 전하고 싶구나 |
17. 다니카와 별 이름 모르고 싶다 꽃 이름 외우기 싫다 이름이 없어도 있어도 다 같이 살아 있는데 신은 명명 이전의 혼돈된 세계에서 다만 졸고 있으라 |
18. 신경림 나를 스쳐간 사람들 그 이름들을 나는 모른다 모두 별이 되어 가슴에 박혀 있을 뿐 이름들을 잊어 비로소 아름다워진 그 까닭 알려 해서 무엇하랴 |
19. 다니카와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가끔 별사탕을 입에 넣는다 형형색색의 야릇한 별 그 작은 뿔들이 혀 위에서 녹아간다 어린 시적의 순진함을 간직하고 싶네 |
20. 신경림 방안 가득한 찔레꽃 향기 코를 간질이는 보리 익는 내음 초여름 밤바람은 사정이 없구나 나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들뜨니 |
23. 다니카와 마당에 나가 먼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어린 동생이 늦게 찾아오는 소리에 환성을 지른다 학교에 다니는 형은 책상 앞에서 [어린 왕자]를 읽고 있다 이제부터다 둘 다 |
24. 신경림 아이들이 햇볕을 쬐느라 문 밖에 나와 서 있다 나무와 꽃과 새와 동무가 되어서 햇살은 잔난꾼처럼 몸을 막 간질이고 모두를 못 견뎌 깔깔대고들 웃는다 오랜 장마 끝이라서 아침이 더 찬란하다 |
두 시인은 서로의 시를 낭송하고 질문하며 대담을 이어가며 서로 참 많이 닮았음을 느낀다.아파트에 사는데 우편물이 다 못 들어가서 집배원을 고생시킨다는 신경림의 말에 다나카와는 우편물이 너무 많아서 방에 바로 연결되는 큰 우편함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거기에 초등학생이 도둑질하러 들어왔다는 일화도 전한다. (74쪽)
사람의 나이를 나무 나이테의 이미지로 파악하는 다나카와는 나이테의 가장 밖이 현재의 나이이고, 그 늙은 나의 중심에는 아이인 나와 태어난 순간의 나도 있다고 말한다. 억압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뛰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란다. 일본에 나이가 들면 다시 어린애가 된다는 뜻으로 '두 번째 아이'라는 말이 있다며 한국에 비슷한 속담이 있는지 묻는다. 신경림은 한국에서도 '늙으면 애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며 나이를 먹어서 오히려 애가 되는 것 같고, 아이 때 생각도 많이 나고, 애 같은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다나카와도 나이 들면 어린애의 마음이 돼서 글 쓰는 게 오히려 편하다. 어른들이 갖고 있는 복잡한 논리나 관념 같은 게 귀찬하져 삶의 기본으로 돌아가면 어린아이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80쪽)
별이 된 시인
2024년, 두 시인은 별이 되어 우리들의 마음에 들어왔다. 첫 시집[농무] 이래 민중의 삶에 밀착한 리얼리즘과 뛰어난 서정성, 민요의 가락을 살린 시로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바꾸고 민중시의 시대를 연 신경림 시인은 2024년 5월 89세로 별이 되었다. 일본의 국민시인이자 우리에게는 '우주소년 아톰' 주제가 작사자로 알려진 다니카와도 2024년 11월 92세의 나이로 별이 되었다. 두 시인의 시와 인간미 넘치는 대담은 잔잔한 파도가 되어 별을 비춰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