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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머무는 곳_[반이나 차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

책 읽는 그대 2025. 4. 17. 01:21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 그림, 이지원 옮김 논장, 2008

 

 

 

모든 사물의 상대적 진실

 폴란드 그림책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작품을 참 좋아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많은 그림책을 출간했고, 그 책들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반이나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  책 제목을 가리고 도서명을 유추하게 하면 간혹 책 제목과 같이 말하는 사람도 있고, 대다수는 '눈높이'를 말하기도 한다. 제목을 듣고는 긍정과 부정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도 한다.  저자는 아래의 글로 상대적인 이야기임을 알리고 그림과 설명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은 시간과 공간, 서로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모든 사물의 상대적인 진실에 대해 말한다.'

 

 

 

 

시선이 머무는 곳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많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적어도 두 개의 시선이 공존한다.

책 앞뒤 내지 그림

 

 

 물 밖과 물 안의 세계를 구분 짓는 수평선은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선,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선이다. 이렇듯 작가는 같은 것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을 책에 담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크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다. (집에 대한 시선)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어떤 사람에게는 흉하다.(불독에 대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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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우습고, 어떤 사람에게는 슬프다.(광대에 대한 시선)

어떤 사람에게는 나이 들어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젊어 보인다.(노인에 대한 시선) 

 

 

 

 작가의 편지

 글을 쓰기를 마친 작가는 책 끝에 이 책의 주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덧붙였다. 작가의 집필의도를 짐작하고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까해서 옮겨본다. 

 

 

 어린이 여러분에게 

 

만약 여러분이 형제자매와 방을 같이 쓰고 있다면,  아마 조금 좁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럴 때 혼자서 방을 쓰는 친구를 보면 부러울 거예요.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여러분의 방만 한 곳에서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살기도 해요.

그리고 그런 방 하나를 가지는 것이 어느 한 가족의 소원일 수도 있고요.

방 하나가 이렇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지요.

 

만약 여러분의 신발이 단 한 켤레라면 

매일 다른 신발을 신고 오는 친구가 부러울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신발이 하나도 없는 누군가는  여러분의 신발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지도 몰라요.

 

하늘과 물이 만나는 그 경계선이 물고기에게는 세상의 끝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새에게는 세상의 시작일 거예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그 경계선을 이해하려면,

물고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봐야 해요.

새는 아래를 내려다봐야 하지요. 

 

어쩌면 이 책은 여러분이 세상을 더 넓게 보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몰라요.

단지 여러분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상대방의 관점 모두에서 말이지요.

이 책은 단순하지만 관용, 받아들임, 다른 이에 대한 이해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에요.

바로 '상대주의'의 개념에 대해서요.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이 한 가지 사실을 바라보지만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내용에 대해서요.

 

마치 물고기와 새처럼요.

 

2008년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새롭게 짓는 제목  '요만큼이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이 책의 제목을 새롭게 짓는다면 뭐라고 할지 묻고 싶다. 저자의 집필 의도대로라면 표지가 주는 이미지와 제목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긍정과 부정을 떠올릴 것이며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은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생각해 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늘 상대적이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보편적인지 선택적인지, 객관적인지 주관적인지 논하자는 것도 아니다. 

 

 단,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상대적인 모든 일을 마주할 때 그 일의 당사자이거나 제3자이더라도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짐이 없이 정확하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봤다. 나의 감정을 쏙 빼고, 반이나 또는 반밖에라고 말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요만큼이네."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