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국 페미니즘 고전_[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책 읽는 그대 2025. 4. 11. 14:49

나혜석 지음 / 장영은 엮음 /민음사 2018

 

 

 

나혜석의 목소리

 행려병자로 객사한 나혜석, 우리가 알 듯이 그 삶의 끝은 고난과 좌절 그리고 불행으로 점철된다. 지역의 사찰에 다녀갔던 일화로 한번쯤 더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 앉게 되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자세히 알고 싶던 차에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꼭 집어서 말하지 않더라도 글 속에는 작가의 사상과 가치관 등 작가의 모든 것이 담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성의 역사는 제대로 된 기록을 찾기 어려울 뿐더러 좀처럼 마음 놓고 만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이 책에는 나혜석의 대표작 단편소설 <경희>를 비롯하여 논설, 수필, 인터뷰, 대담이 수록됐다. 나혜석의 작품 및 여타의 활동을 통해서 나혜석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도서 4쪽 이미지

 

 

가치있는 욕

 이 세상의 변화는  많은 갈등과 대립이 있고서야 일어난다. 야무지고 확신에 찬 나혜석의 말대로 그 자신이 가치있는 욕을 먹으며 시대의 부조리를 바꾸고자 하였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 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 있다 하면 우리는 안심이오."라는 말처럼 시대를 앞선 삶을 살아간 그에게 쏠린 온갖 부정적인 시선에 머뭇거림이 없이 대응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주었다. 

 

 여자와 남자에게 각각 다른 평가의 잣대를 가지고 있던 우리 사회. 나혜석은 불륜녀, 이혼녀 등의 꼬리표를 가지고 있었다. 무성한 소문에 대항해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과정들을 <이혼 고백장-청구(靑邱) 씨에게>를 <삼천리> (1934. 8.~9.)에 발표했다. '약혼까지의 내력, 11년간 부부생활, 주부로서 화가 생활, 구미 만유,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대립적 생활, C와 관계, 가운은 역경에, 이혼, 이혼 후, 어디로 향할까,모성애, 금욕 생활, 이혼 후 소감, 조선 사회의 인심, 청구 씨에게'라는 작은 소제목을 보더라도 그의 삶 전반을 세세하게 써내려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사회의 인심'에서는 사회일반에 깔린 편협된 시선을 지적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체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전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혼 고백장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맺고 있다. 

  하여간 이상 몇 가지 주의로 이혼은 내 본의가 아니요, 씨의 강청이었나이다. 나는 무저항적으로 양보한 것이니 천만 번 생각해도 우리 처지로 우리 인격을 통일치 못하고 우리 생활을 통일 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울러 바라는 바는 여든 노모의 여생을 편하게 하고, 네 아이의 양육을 충분히 주의해 주시고 나머지는 씨의 건강을 바라나이다.

 

나혜석에 대한 새로운 생각

 좀처럼 손에서 뗄 수 없는 나혜석의 힘있는 목소리들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남의 시선으로만, 남의 이야기를 재미삼거나 논란거리를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꺼내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의  이야기들을 만나면서 과연 그는 이 세상을 떠날 때 불행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세상의 질타 속에서 다시 일어서려던 예술가는 그를 보듬어 줄 수 없는, 아니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에 항변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살았다. 삶의 끝에 객사를 했지만 불행한 삶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삶의 여건들이 예술가로서 충분히 빛을 발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내일의 세대를 위해 세상을 바꿔보려했던 그의 삶을 그 스스로 충분히 사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